[인사이트]천칭 위의 라바

타이포그래피 저널 『글짜씨』 23호 기고문

*본 아티클은  『글짜씨』 23호 기고문에서 일부 용어만 수정되어 발행되었습니다.


구글과 어도비에서 개발한 「노토 산스」와 함께 다국어 폰트 개발에 큰 바람이 불어왔다. 삼성의 「삼성원(Samsung One)」, IBM의 「IBM 플렉스(IBM Plex)」 등 내로라하는 글로벌 기업들은 다국어 폰트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아모레퍼시픽은 「아리따 흑체」를 개발하는 등 국내 기업 또한 필요에 따라 다국어 폰트를 개발했다. 이뿐 아니라 산돌은 폰트플랫폼인 산돌구름에 해외 폰트 회사를 꾸준히 입점시키며 글로벌 시장에 대응하고 있고, 네덜란드 폰트 회사 티포텍(Typotheque)과 협업하여 「sandoll 그레타산스」, 「sandoll 라바」, 「sandoll 노벰버」와 같은 다국어 폰트 패밀리를 개발하고 있다. 또한 류양희 디자이너의 「윌로우(Willow)」처럼 다국어 폰트 가족을 기획하거나, 함민주 디자이너의 「블레이즈페이스(Blazeface)」와 윤민구 디자이너의 「파보리트 한글(Favorit Hangul)」처럼 라틴 폰트를 한글화하는 등 독립 디자이너들도 다국어 폰트 개발에 기민하게 대응하고 있다. 각기 다른 언어를 하나의 목소리로 말하는 것, 그것이 다국어 폰트 개발의 요점일 것이다.


미슬라 리브세칼은 디자이너들에게 “가독성과 문법을 비롯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원어민의 참여는 필수”라고 조언한다. 그는 디자이너가 해당 언어의 문해력이 없을 때 폰트 디자인에 새로운 시각을 줄지는 몰라도, 미적으로만 판단하다가 오해를 초래하는 일은 없어야 함을 알게 됐다.


뤼번 파터르, 『디자인 정치학』(고트, 2022), 32쪽.



각국의 문자에서 발생하는 맥락을 결코 원어민보다 잘 알 수는 없다. 이것이 다국어 폰트 프로젝트의 제작 과정에 원어민이 직접 참여하거나 감수를 하는 이유다. 이런 기본 전제를 바탕으로 기존의 「라바」를 한글화하는 과정에서 라틴 폰트 디자인의 맥락을 이어 간 부분과 한글의 고유한 맥락을 따른 부분을 짚어 보고자 한다.

티포텍에서 설명한 「라바」에 대한 글을 읽어 보면, 라바는 네덜란드의 디자인 잡지 『웍스 댓 워크(Works that Work)』를 위해 개발됐다.* 긴 글에 8-12포인트로 조판됐을 때 읽기 좋은 현대적인 세리프 폰트 패밀리다. 가독성 높은 본문용이라는 목적을 고려하여 애퍼처(aperture)와 카운터(counter)를 크게 디자인하고 세로 비율을 넉넉하게 설계했으며 스페이싱(spacing)과 커닝(kerning)은 일관적으로 설정했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형태의 디테일을 살펴보면, 「라바」의 소문자 세리프 디자인은 일반적인 세리프와는 다르게 쓰기 방식에서 보이는 표현을 상당히 가미한 형태다. 

*Typotheque, 「About Lava」,(링크)


줄기와 이어지는 세리프는 부드럽게 연결되어 있으나 세리프의 획 끝은 잘려 나간 듯 직선으로 처리되어 있어 자칫 너무 부드럽게만 보일수 있는 인상을 보완해 주는 역할을 한다. 부드러움과 날카로움이 병립하는 획의 디자인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설계되어 「라바」만의 오묘한 인상을 아낸다. 이러한 획의 디테일은 굵은 웨이트로 갈수록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만, 하나의 패밀리 안에서 본문과 제목 등 다양한 용도에 맞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한 점이 인상적이다. 획, 공간, 쓰기 방식 등 어느 모로 보나 하나하나 무게추를 달아 가며 이것을 더하면 저것을 제하듯이, 저울의 평형을 섬세하고도 조화롭게 유지하려 한 것이 느껴지는 폰트다.


「라바」 라틴의 전반적인 특징을 인지한 채 「라바」 한글을 바라보면, 라틴과 동일한 설계 방식을 따르려 한 디자이너의 노력을 곳곳에서 엿볼 수 있다. 「라바」 라틴에서 가독성을 위해 설계된 큰 애퍼처와 카운터는 한글 낱글자의 큰 속공간으로 이어진다. 이로 인해 자면이 커지고 현대적인 인상을 자아내며 작은 크기로 조판될 때 가독성이 좋다. 라틴과 한글 각 문자에 폰트를 적용했을 때 효과가 동일한 경우다. 또한 속공간을 일관적으로 설계하여 정교한 인상을 가미하려 했다. 좀 더 자세히 획의 윤곽을 살펴보면, 피읖의 내릿점, 치읓과 히읗의 꼭지점 등에서 붓글씨의 맥락을 따르려 한 부분이 보인다. 펜과 붓, 서로 다른 쓰기 도구에서 비롯하는 다른 맥락으로 인해 획의 양상은 약간 다를 수 있으나, 부리 끝을 직선으로 처리하는 방식으로 「라바」 라틴에 대응했다. 또한 리을과 미음을 비교적 곧은 직선으로 처리한 것은 쓰기 맥락을 따르면서도 자칫 예스러워 보일 수 있는 여지를 최소화하려 한 노력으로 느껴진다. 부드러운 부리로 시작하지만 일직선으로 곧게 내려가는 기둥의 형태, 그리고 비교적 예리한 부리로 시작하지만 탄력 있는 곡선으로 이어지는 보의 형태가 부드러움과 날카로움이 끊임없이 병행하는 「라바」의 정체성을 닮아 있다.

이렇게 「라바」 한글은 획과 공간 곳곳에서 「라바」 라틴의 정체성을 따르려 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재미있는 부분은 한글만의 독자성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sandoll 라바」를 디자인하며 특히 신경 쓴 부분은 글자 사이사이에 흩어져 있는 흰 공간을 균질하게 배분하는 것이었습니다. 웨이트가 달라지더라도 같은 인상이 유지되도록 했고, 웨이트마다 가장 자주 사용될 크기를 기준으로 공간을 조정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본문용 웨이트인 라이트(Light)의 한글은 글자 너비가 같지만 나머지 웨이트는 모두 조금씩 다릅니다.


산돌구름, 「sandoll 라바」, (
링크) 


「sandoll 라바」의 소개글을 읽어 보면 디자이너는 본문용 굵기를 레귤러(Regular)가 아닌 라이트로 제작했다고 한다. 레귤러의 굵기감은 보통 본문용으로 사용되지만 문자마다 실질적인 굵기감은 다를 수 있다. 다시 말해 한국과 라틴 문자권 국가에서 각각 통용되는 본문용 굵기감이 상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라틴 문자권에서 통용되는 본문용 폰트의 굵기감에 비해 한국에서 선호하거나 주로 쓰이는 본문용 폰트의 굵기감이 얇은 것은 한글이 라틴에 비해 물리적인 획의 수가 많은 데서 비롯한 게 아닐까 추측해본다. 


실제로 산돌에서 티포텍과 협업하여 개발한 프로젝트인 「sandoll 그레타산스」 레귤러의 굵기감과 「sandoll 고딕네오1」 「노토 산스 KR」 레귤러의 굵기감을 비교해 보면 「sandoll 그레타산스」의 레귤러가 확실히 두껍다. 마찬가지로 「sandoll 라바」 레귤러도 「sandoll 명조네오1」 「노토 세리프 KR」의 각 레귤러와 비교했을 때 확연히 두껍다. 이는 원래의 굵기감을 따르는 협업 프로젝트의 피치 못할 사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박수현 디자이너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한국에서 통용되는 본문용 두께에 상응하는 「라바」 라이트를 마스터로 지정해 더욱 섬세히 개발했다.

일부 문장부호의 변형은 「라바」 한글의 또 다른 독자성이다. 「sandoll 라바」 디자이너는 한글에 걸맞게 개발된 주요 문장부호를 추가적으로 제작했고 기존의 라틴 문장부호를 오픈타입피처(OpenType Feature) 기능으로 포함시켰다. 라틴의 대문자 높이(Cap Height)에 맞춰 정렬되는 크기에서 벗어나, 한글 자체의 크기와 공간에 맞추려 한 셈이다. 특히 크기나 위치를 조정할뿐 아니라 형태 자체가 변하는 등 한글에 맞춰 개발된 문장부호는 다른 다국어 폰트에서 보지 못한 새로운 시도다.


「sandoll 라바」는 기존 「라바」의 유전적인 특징을 따르면서도 한국에서의 보편적인 사용 환경을 고려하고 한글 고유의 맥락을 따르려 한 흥미로운 프로젝트다. 한글과 라틴의 팽팽한 균형감.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전복시키지 않으려는 디자이너의 노력이 느껴진다. 이러한 다국어 협업 프로젝트는 한글 디자인에 새로운 환기를 일으킨다. 한글의 고유성과 타국 문자의 고유성 사이엔 동일한 지점과 상이한 지점이 공존한다. 따라서 디자이너는 어떤 부분을 취하고 어떤 부분을 버릴 것인지 깊은 고민에 빠진다. 정답은 없다. 어느 슬라이더 위에 한 지점으로 자리할 뿐이다.

유감스럽게도 요즈음 세계는 어린 시절에 배웠던 세계화의 개념과는 영 반대로 흘러가고 있다. 코로나-19, 전쟁 등 다양한 이유로 인해 탈세계화라는 개념이 대두되고 있고 나라 간 장벽이 높아지고 있다는 걸 체감할 정도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도 문자는 나라의 근간이자 문화 그 자체이기 때문에 다국어가 갖는 문화적인 의미는 여전히 매우 중요하다. 여러 요인으로 멀어지고 있는 세계를 문화의 힘만으로 이겨 내기는 어렵겠지만, 각국의 문화 연결 고리가 희미해지지 않도록 자국과 타국의 문자에 관심을 두고 지속해서 살피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폰트 디자이너의 역할이지 않을까.


김슬기
기획운영팀
산돌에서 폰트 디자이너로 일합니다.
최근에는 온갖 취미에 묻혀 살고 있습니다.

당신과 함께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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