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
*본 아티클은 『글짜씨』 24호 기고문에서 일부 용어만 수정되어 발행되었습니다.
성적 소수자 활동가이자 자긍심의 무지개를 고안한 길버트 베이커(1951–2017)를 기리며 만들어진 영문 서체 「길버트체(Gilbert Typeface)」의 한글판 서체입니다. 「길벗체」라는 이름에는 길버트 베이커의 뜻을 잇는다는 의미와 동시에,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를 향한 여정(길)을 함께하는 ‘벗’의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길벗체」는최초로 전면 색상을 적용한 완성형 한글 서체입니다.
—『길벗체해례본』 중
2020년 9월에 「무지갯빛 길벗체」가 출시된 이후, 11월에 「트랜스젠더 길벗체」, 2021년 1월에 「바이섹슈얼 길벗체」가 출시되었다.
—『길벗체해례본』 중
온 오프라인에서 「길벗체」를 사용한 제작물을 발견할 때면 자연스럽게 그 제작물이 속한 공간은 안전하다고 여기게 된다. 이처럼 제작물에 특정 폰트를 사용하는 것 자체로 제작자와 감상자 간의 교감을 끌어내는 일은 드물고, 그렇기에 귀하다. 하지만 「길벗체」가 여러 방면에서 활발히 쓰이는 이유는 디자이너가 부여한 상징성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난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어서 웃음이 많은 사람을 좋아한다. 따뜻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사람은 어디서나 존재감을 손쉽게 드러낸다. 그런 이에겐 마음을 열기도 쉽다. 나에겐 「길벗체」의 첫인상이 그랬다. 단단하게 연결된 글줄 속 경쾌한 리듬을 품은 유쾌하고 상냥한 인상의 폰트. 한 벌의 폰트는 디자이너가 내리는 수많은 선택을 거쳐 완성된다. 그리고 그런 다양한 선택은 디자이너의 의도를 드러내기 위해 조화롭게 연결되어 있다. 「길벗체」의 형태 역시 제작 목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길벗체」는 정사각형 네모꼴을 가득 채우는 골격이다. 특징적인 점은 가로모임 받침글자에서 네모꼴을 상하로 채우는 첫닿자와 받침닿자의 비율이다. 일반적으로 본문용 한글 민부리 폰트의 받침글자는 첫닿자와 받침닿자의 시각적 무게감을 약 5:5로 맞춰 안정적인 구조를 취한다.
하지만 「길벗체」는 첫닿자 쪽 여백에 분명한 무게를 둔다. 「길벗체」의 획 굵기는 「SD 그레타산스」 볼드(Bold)와 유사한데, 이처럼 획이 굵은 폰트는 네모꼴 안에서 받침닿자의 비율이 줄어들 경우 획 두께의 일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받침닿자 속공간을 더욱 잘게 나눌 수밖에 없다. 두꺼운 획과 좁은 속공간에 의해 받침닿자 공간의 밀도는 더욱 높아진다. 받침닿자의 획끼리 당기는 힘도 강해진다. 이로 인해 획 사이의 여백은 시각적으로 더욱 좁아 보인다. 첫닿자와 받침닿자의 공간 격차를 극대화한 구조와 굵기의 조합인 것이다. 이렇게 생겨난 대비는 닿자 사이의 긴장감을 조성하고 균질한 공간이 주는 정적이고 정갈한 느낌 대신 역동적인 공간감을 형성한다. 이러한 의도는 닿자 디자인에서도 드러난다.
「길벗체」 기역의 생김새는 옛 활자 시대 훈민정음해례본에 나타난 기역과 동일하다. 가로획과 세로획이 수직으로 만나는 기하학적 형태다. 그렇기에 「길벗체」는 첫닿자 공간을 활용하는 방식이 특징적이다. 일반적인 폰트의 꺾임기역에서는 삐침이 첫닿자 공간을 사선으로 이등분하는 반면에 「길벗체」에서는 첫닿자의 큰 공간을 통째로 활용할 수 있다. 기역의 공간이 니은과 유사해지는 셈이다. 이러한 기역은 판면 내 큰 부피감을 맡은 여백의 등장 빈도를 높인다. 유사한 기역 형태를 띠는 「아리따 돋움」과 비교해 보자. [도판 2]를 보면 가로모임 받침글자에서 「길벗체」와의 차이점을 알 수 있다. 기역은 세로획 아래쪽에서 한 번 더 왼쪽으로 꺾여 갈고리 모양으로 변주되고, 이러한 모양의 기역은 받침글자의 받침닿자와 만나며 그 효능을 발휘한다. 비어 있어야 할 삐침의 아래 공간을 첫닿자가 이루는 수평의 직선이 채워주는 형상인 것이다. 그로 인해 가로모임 받침글자의 첫닿자에 기역과 쌍기역이 올 땐 마치 미음과 비읍이 올 때처럼 가늘고 선명한 직선 모양의 사이 공간이 형성된다.
기역과 유사한 사선 삐침이 있는 시옷에도 같은 규칙이 적용되었다. 시옷에 적용된 방식은 신선한 삐침과 내림의 기울기로 인해 더욱 흥미롭다. 일반적으로 시옷은 비스듬한 기울기의 직선 두 개를 이어 붙여 만든다. 이때 시옷의 공간은 삼등분된다. 하지만 「길벗체」의 시옷은 삐침과 내림이 한 세로획으로부터 좌우로 뻗어나가 각각 세로획과 직각을 이룬다. 삐침과 내림은 대칭을 이루며 공간을 커다랗게 이등분한다. 또한 기역과 마찬가지로 수평의 직선이 닿자의 하단을 마감한다. 두꺼운 부리가 크게 비어버린 공간의 중심을 잡아주고, 첫닿자의 하단 중심에 세모꼴의 작고 뾰족한 파임을 넣어 기역과의 통일성을 유지하면서도 시옷으로 판독할 수 있도록 조정했다. 14pt 정도의 작은 크기로 보았을 때 위쪽의 덩어리감에 대비되어 잉크 트랩같이 작고 예리하게 반짝이는 공간이 매력적이다.
도판 1
도판 2
도판 3
이로써 가로모임 받침글자에서 첫닿자의 하단이 수평의 직선으로 마무리되는 경우는 열아홉 개 중 열여섯 개가 되었다. 오밀조밀하고 일관된 사이 공간의 형태와 가지런하게 수평으로 정렬되어 반복되는 직선이 글줄 내에서 단단하고 정연한 질감을 형성한다. 이런 질감은 열린 공간의 닿자가 자아내는 시원하고 역동적인 공간감과 서로를 보완해 주며 잘 어우러진다. 이 결합이 「길벗체」가 말하고자 하는 다양성에 대한 개방 및 연대 의식과 맞닿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어서 「길벗체」의 또 다른 특징인 크고 부드럽게 꺾인 파이프 형태의 부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길벗체」의 모태가 되는 영문 폰트 「길버트체」에서 가져왔다. 펄럭이는 깃발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러한 한글의 부리 형태를 보면 자연스럽게 영문의 슬래브 세리프 스타일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여기에 반전이 있으니, 바로 「길버트체」는 산세리프 스타일의 서체라는 점이다. 「길벗체」의 부리에 적용된 형태는 「길버트체」의 ‘a’와 ‘b’의 스퍼(spur) 그리고 ‘r’의 터미널(terminal) 등에 적용돼 있다.
하지만 배성우 디자이너는 한글화 과정에서 이 형태를 세로획 부리에 적용함으로써 좀 더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부리의 ‘니’에서 가장 굵고 크며 ‘뺄’ ‘뵀’과 같은 복잡한 모임 글자꼴로 갈수록 점점 얇고 작아진다. 섬세하게 조정된 여러 크기와 곡률을 띠는 부리들이 모여 있을 때 시각적으로 자연스러운 그라데이션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을 거쳐 특징적인 형태감을 유지하는 동시에 판면에서 거슬리는 곳이 없도록 제작했을 것이다.
획이 겹치고 나뉘는 지점에도 세로획 부리와 동일한 곡률의 곡선이 적용됐다. 이를 「길벗체」의 형태적 특성으로서 가져간 순간 2,780자 내에서 곡선은 무수히 확장했다. 한 글자당 적게는 한 번, 많게는 열두 번까지 중첩한다. 판면 위 일관된 형태의 크고 작은 곡선들은 끊임없이 반복되며 깨지지 않는 잔잔한 리듬감을 만들어낸다.
색상 대비가 적어 비슷해 보이는 계열의 색상으로 배합하면 획이 겹치는 부분의 농도를 조절할 수 있었다. 대체로 보라색, 빨간색, 주황색, 노란색, 초록색, 파란색 순으로 색을 사용해야 가독성을 높일 수 있다. 이 규칙으로 초성, 중성, 종성을 분리하여 글자 조합이 너무 붉거나 파랗지 않도록 했는데, 예를 들어 자음이 붉은 계열일212 213 때 모음을 푸른 계열의 조합으로 사용하면 보기 좋은 온도로 느껴졌다.
—『길벗체해례본』 중
도판 4
도판 5도판 6
일견 무작위로 보일 수 있는 색상의 배치도 사용성을 고려한 디자이너의 결과물이다. 만약 [도판6]처럼 획과 획이 중접하는 부위를 흰색 선 또는 흰색 여백으로 구분한다면 강한 흑백 대비가 가독성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세심한 조정을 거쳐 이제 우리는 글자 속에서 수많은 깃발이 질서 정연하게 나부끼는 모습을 본다. 큰 크기로 조판할 때 곡선은 하나하나 힘 있게 율동한다. 그보다 작게 조판할 땐 한눈에 들어오는 전체의 모양새에서 반짝이는 다채로움을 느낄 수 있다.
새삼 멋지고 용감하다. 내포한 가치도, 이러한 형상으로 완결하기까지 되풀이했을 디자이너의 무수한 시도도. 폰트의 매력적인 형태는 사용자를 끌어들인다. 그래서 「길벗체」에 담긴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원래의 염원을 거스르는 곳에 쓰이기도 했다. 그러자 누군가는 이의를 제기했고 누군가는 그 안에 담긴 가치를 되돌아보았다. 이 또한 폰트로 이룰 수 있는 효과적이고 훌륭한 운동의 한 방식이 아닐까.
“이 귀여운 폰트는 뭐야!”
글을 쓰며 참고하기 위해 화면 가득 커다랗게 띄워둔 「길벗체」를 보자마자 옆의 친구가 말한다. 과연 반짝반짝 웃으며 말을 붙여 오는 사랑스러운 폰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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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혜은 |
기획운영팀 |
산돌에서 글자를 그리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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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아티클은 『글짜씨』 24호 기고문에서 일부 용어만 수정되어 발행되었습니다.
온 오프라인에서 「길벗체」를 사용한 제작물을 발견할 때면 자연스럽게 그 제작물이 속한 공간은 안전하다고 여기게 된다. 이처럼 제작물에 특정 폰트를 사용하는 것 자체로 제작자와 감상자 간의 교감을 끌어내는 일은 드물고, 그렇기에 귀하다. 하지만 「길벗체」가 여러 방면에서 활발히 쓰이는 이유는 디자이너가 부여한 상징성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난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어서 웃음이 많은 사람을 좋아한다. 따뜻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사람은 어디서나 존재감을 손쉽게 드러낸다. 그런 이에겐 마음을 열기도 쉽다. 나에겐 「길벗체」의 첫인상이 그랬다. 단단하게 연결된 글줄 속 경쾌한 리듬을 품은 유쾌하고 상냥한 인상의 폰트. 한 벌의 폰트는 디자이너가 내리는 수많은 선택을 거쳐 완성된다. 그리고 그런 다양한 선택은 디자이너의 의도를 드러내기 위해 조화롭게 연결되어 있다. 「길벗체」의 형태 역시 제작 목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길벗체」는 정사각형 네모꼴을 가득 채우는 골격이다. 특징적인 점은 가로모임 받침글자에서 네모꼴을 상하로 채우는 첫닿자와 받침닿자의 비율이다. 일반적으로 본문용 한글 민부리 폰트의 받침글자는 첫닿자와 받침닿자의 시각적 무게감을 약 5:5로 맞춰 안정적인 구조를 취한다.
하지만 「길벗체」는 첫닿자 쪽 여백에 분명한 무게를 둔다. 「길벗체」의 획 굵기는 「SD 그레타산스」 볼드(Bold)와 유사한데, 이처럼 획이 굵은 폰트는 네모꼴 안에서 받침닿자의 비율이 줄어들 경우 획 두께의 일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받침닿자 속공간을 더욱 잘게 나눌 수밖에 없다. 두꺼운 획과 좁은 속공간에 의해 받침닿자 공간의 밀도는 더욱 높아진다. 받침닿자의 획끼리 당기는 힘도 강해진다. 이로 인해 획 사이의 여백은 시각적으로 더욱 좁아 보인다. 첫닿자와 받침닿자의 공간 격차를 극대화한 구조와 굵기의 조합인 것이다. 이렇게 생겨난 대비는 닿자 사이의 긴장감을 조성하고 균질한 공간이 주는 정적이고 정갈한 느낌 대신 역동적인 공간감을 형성한다. 이러한 의도는 닿자 디자인에서도 드러난다.
「길벗체」 기역의 생김새는 옛 활자 시대 훈민정음해례본에 나타난 기역과 동일하다. 가로획과 세로획이 수직으로 만나는 기하학적 형태다. 그렇기에 「길벗체」는 첫닿자 공간을 활용하는 방식이 특징적이다. 일반적인 폰트의 꺾임기역에서는 삐침이 첫닿자 공간을 사선으로 이등분하는 반면에 「길벗체」에서는 첫닿자의 큰 공간을 통째로 활용할 수 있다. 기역의 공간이 니은과 유사해지는 셈이다. 이러한 기역은 판면 내 큰 부피감을 맡은 여백의 등장 빈도를 높인다. 유사한 기역 형태를 띠는 「아리따 돋움」과 비교해 보자. [도판 2]를 보면 가로모임 받침글자에서 「길벗체」와의 차이점을 알 수 있다. 기역은 세로획 아래쪽에서 한 번 더 왼쪽으로 꺾여 갈고리 모양으로 변주되고, 이러한 모양의 기역은 받침글자의 받침닿자와 만나며 그 효능을 발휘한다. 비어 있어야 할 삐침의 아래 공간을 첫닿자가 이루는 수평의 직선이 채워주는 형상인 것이다. 그로 인해 가로모임 받침글자의 첫닿자에 기역과 쌍기역이 올 땐 마치 미음과 비읍이 올 때처럼 가늘고 선명한 직선 모양의 사이 공간이 형성된다.
기역과 유사한 사선 삐침이 있는 시옷에도 같은 규칙이 적용되었다. 시옷에 적용된 방식은 신선한 삐침과 내림의 기울기로 인해 더욱 흥미롭다. 일반적으로 시옷은 비스듬한 기울기의 직선 두 개를 이어 붙여 만든다. 이때 시옷의 공간은 삼등분된다. 하지만 「길벗체」의 시옷은 삐침과 내림이 한 세로획으로부터 좌우로 뻗어나가 각각 세로획과 직각을 이룬다. 삐침과 내림은 대칭을 이루며 공간을 커다랗게 이등분한다. 또한 기역과 마찬가지로 수평의 직선이 닿자의 하단을 마감한다. 두꺼운 부리가 크게 비어버린 공간의 중심을 잡아주고, 첫닿자의 하단 중심에 세모꼴의 작고 뾰족한 파임을 넣어 기역과의 통일성을 유지하면서도 시옷으로 판독할 수 있도록 조정했다. 14pt 정도의 작은 크기로 보았을 때 위쪽의 덩어리감에 대비되어 잉크 트랩같이 작고 예리하게 반짝이는 공간이 매력적이다.
도판 1
도판 2
도판 3
이로써 가로모임 받침글자에서 첫닿자의 하단이 수평의 직선으로 마무리되는 경우는 열아홉 개 중 열여섯 개가 되었다. 오밀조밀하고 일관된 사이 공간의 형태와 가지런하게 수평으로 정렬되어 반복되는 직선이 글줄 내에서 단단하고 정연한 질감을 형성한다. 이런 질감은 열린 공간의 닿자가 자아내는 시원하고 역동적인 공간감과 서로를 보완해 주며 잘 어우러진다. 이 결합이 「길벗체」가 말하고자 하는 다양성에 대한 개방 및 연대 의식과 맞닿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어서 「길벗체」의 또 다른 특징인 크고 부드럽게 꺾인 파이프 형태의 부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길벗체」의 모태가 되는 영문 폰트 「길버트체」에서 가져왔다. 펄럭이는 깃발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러한 한글의 부리 형태를 보면 자연스럽게 영문의 슬래브 세리프 스타일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여기에 반전이 있으니, 바로 「길버트체」는 산세리프 스타일의 서체라는 점이다. 「길벗체」의 부리에 적용된 형태는 「길버트체」의 ‘a’와 ‘b’의 스퍼(spur) 그리고 ‘r’의 터미널(terminal) 등에 적용돼 있다.
하지만 배성우 디자이너는 한글화 과정에서 이 형태를 세로획 부리에 적용함으로써 좀 더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부리의 ‘니’에서 가장 굵고 크며 ‘뺄’ ‘뵀’과 같은 복잡한 모임 글자꼴로 갈수록 점점 얇고 작아진다. 섬세하게 조정된 여러 크기와 곡률을 띠는 부리들이 모여 있을 때 시각적으로 자연스러운 그라데이션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을 거쳐 특징적인 형태감을 유지하는 동시에 판면에서 거슬리는 곳이 없도록 제작했을 것이다.
획이 겹치고 나뉘는 지점에도 세로획 부리와 동일한 곡률의 곡선이 적용됐다. 이를 「길벗체」의 형태적 특성으로서 가져간 순간 2,780자 내에서 곡선은 무수히 확장했다. 한 글자당 적게는 한 번, 많게는 열두 번까지 중첩한다. 판면 위 일관된 형태의 크고 작은 곡선들은 끊임없이 반복되며 깨지지 않는 잔잔한 리듬감을 만들어낸다.
도판 4
도판 5도판 6
일견 무작위로 보일 수 있는 색상의 배치도 사용성을 고려한 디자이너의 결과물이다. 만약 [도판6]처럼 획과 획이 중접하는 부위를 흰색 선 또는 흰색 여백으로 구분한다면 강한 흑백 대비가 가독성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세심한 조정을 거쳐 이제 우리는 글자 속에서 수많은 깃발이 질서 정연하게 나부끼는 모습을 본다. 큰 크기로 조판할 때 곡선은 하나하나 힘 있게 율동한다. 그보다 작게 조판할 땐 한눈에 들어오는 전체의 모양새에서 반짝이는 다채로움을 느낄 수 있다.
새삼 멋지고 용감하다. 내포한 가치도, 이러한 형상으로 완결하기까지 되풀이했을 디자이너의 무수한 시도도. 폰트의 매력적인 형태는 사용자를 끌어들인다. 그래서 「길벗체」에 담긴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원래의 염원을 거스르는 곳에 쓰이기도 했다. 그러자 누군가는 이의를 제기했고 누군가는 그 안에 담긴 가치를 되돌아보았다. 이 또한 폰트로 이룰 수 있는 효과적이고 훌륭한 운동의 한 방식이 아닐까.
“이 귀여운 폰트는 뭐야!”
글을 쓰며 참고하기 위해 화면 가득 커다랗게 띄워둔 「길벗체」를 보자마자 옆의 친구가 말한다. 과연 반짝반짝 웃으며 말을 붙여 오는 사랑스러운 폰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