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
배달의민족(이하 배민)은 산돌과 10여 년째 협업하며 다양하고 재미있는 폰트를 출시하고 있습니다. 배민을 잘 드러낼 수 있는 브랜드 전용 폰트를 만들고 싶다는 배민 김봉진 대표(당시)의 적극적인 의견 아래, 오래된 간판에서 발견한 투박하고 독특한 형태의 글자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한 것이 바로 「배민 한나」입니다. 이를 시작으로 「배민 주아」, 「배민 도현」, 「배민 연성」 등 레트로하면서도 키치한 인상의 다양한 폰트들을 출시하여 지금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데요. 오늘은 그중 『을지로체 시리즈』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배민 을지로체」의 시작은 산돌의 석금호 의장이 을지로에서 촬영한 한 장의 간판 사진에서 시작됩니다. 1970년대 무명의 간판 장인이 손수 적었다고 알려진 이 간판의 글씨체는 이곳뿐만 아니라 을지로 주변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는데요. 이 사진에서 영감을 얻어 을지로만의 세월과 감성을 지닌 폰트를 만들고자 배민과 산돌이 다시 뭉치게 되었습니다.
「을지로체」는 사라져가는 을지로의 시간을 폰트에 담고자 했습니다. 이를 위해선 을지로에 대해 더 알아갈 필요가 있었는데요. 그래서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진행했던 것이 을지로의 골목골목을 탐방하고 기록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지금은 재개발로 인해 많이 사라진 을지로 거리의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투박한 간판 글씨에서 오는 을지로만의 감성과 정서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느꼈던 공간의 정서를 폰트에 담기 위해서 꽤 오랜 시간을 배민의 디자인팀분들과 함께 소통하면서 구체적인 컨셉을 잡아갔습니다.
어느 정도 컨셉을 그린 이후에는 배민 디자이너분이 직접 손으로 글씨를 그리면서 원도를 만들었습니다. 처음 원도는 붓으로 직접 쓴 글씨다보니 획의 높이와 방향이 각각 다르고, 맺음의 형태도 글자마다 달랐는데요. 자유분방한 형태는 유지하면서 조형적으로 틀어지는 부분은 산돌의 디자이너가 같이 수정하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획의 형태나 인상은 자유분방하면서도 그 안에서 졍돈된 속공간과 비례를 가져가기 위해 수차례의 소통 과정을 거쳤습니다.
『 을지로체』의 원본이 된 손글씨
조형 수정 전(위)과 수정 후(아래)
원도가 나온 이후에는 이를 디지털 폰트로 제작하기 위해 2,350자에 달하는 한글을 한 자씩 그려나가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을지로체」의 원본이 되는 글자의 수가 많지 않다 보니 거의 대부분의 글자를 상상하며 그릴 수밖에 없어 작업이 쉽지 않았는데요. 그럴 때마다 이 글자를 손으로 직접 쓰는 상상을 하면서 내가 직접 무명의 간판 장인이 된 것처럼 작업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후에는 라틴과 문장부호를 그리는 작업을 진행했는데요. 이 작업 또한 배민의 디자이너분이 손으로 직접 글씨를 먼저 그려주면 산돌에서 글자의 조형을 수정하여 완성하는 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그렇게 몇 달의 작업 기간을 거쳐 2019년 「을지로체」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라틴 알파벳의 조형 수정 작업 과정
문장부호 첫 시안
「을지로체」 출시 이후, 배민과 산돌은 을지로의 시간의 흐름을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까 여러 가지 방법들을 고민했는데요. 그러한 고민 끝에 탄생한 것이 「배민 을지로10년후체」와 「배민 을지로오래오레체」 입니다. 간판이 빛바래고 닳아 없어진 형태를 폰트에 담아 을지로의 그저 한순간의 모습뿐만이 아니라 세월의 흔적이 짙어진 을지로의 모습 또한 기억하고자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폰트로써 쓰이기 위해선 글자가 어느 정도 벗겨지는 것이 한계일지, 이 정도로 까져도 사람들이 글자를 읽을 수 있을지 등 많은 고민들이 있었는데요.
세월에 따라 벗겨진 간판들
「을지로10년후체」는 간판에 써진 글씨의 10년 후 모습을 폰트에 담았습니다. 10년이 지난 글씨가 얼마나 벗겨질지를 상상하며 글자가 사라지는 모습을 단계별로 구분하고, 약 20%정도 벗겨진 모습을 기본으로 설정하여 제작했습니다. 반복되는 벗겨진 패턴으로 인해 나타나는 단조로운 인상을 피하기 위해 빈출자는 50%에서 70%정도로 더 벗겨진 형태를 ‘오픈타입 피쳐’ 기능을 추가하여 반복된 글자를 타이핑하면 점점 닳아 없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을지로10년후체」
「을지로오래오래체」는 딱 봤을 때 바로 읽히지는 않지만, 세월의 흔적을 깊이 느낄 수 있는 글씨를 폰트에 담고자 했습니다. 실용성을 최우선으로 보는 폰트의 관점에서 보면 힘든 선택이었지만, 「을지로체」가 을지로의 세월과 그 속에 담긴 을지로와 사람, 그 안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폰트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2021년 『을지로체 시리즈』의 마지막 버전인 「을지로오래오래체」가 출시되었습니다.
이제 『을지로체 시리즈』는 길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분들에게 사랑받는 폰트가 되었습니다. 이 폰트를 필요로 하는 어느 곳에서든 세월의 흔적으로 사용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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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창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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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랩팀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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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를 디자인하며, 폰트가 살아 숨 쉴 수 있도록 기술을 다듬는 일을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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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의민족(이하 배민)은 산돌과 10여 년째 협업하며 다양하고 재미있는 폰트를 출시하고 있습니다. 배민을 잘 드러낼 수 있는 브랜드 전용 폰트를 만들고 싶다는 배민 김봉진 대표(당시)의 적극적인 의견 아래, 오래된 간판에서 발견한 투박하고 독특한 형태의 글자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한 것이 바로 「배민 한나」입니다. 이를 시작으로 「배민 주아」, 「배민 도현」, 「배민 연성」 등 레트로하면서도 키치한 인상의 다양한 폰트들을 출시하여 지금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데요. 오늘은 그중 『을지로체 시리즈』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배민 을지로체」의 시작은 산돌의 석금호 의장이 을지로에서 촬영한 한 장의 간판 사진에서 시작됩니다. 1970년대 무명의 간판 장인이 손수 적었다고 알려진 이 간판의 글씨체는 이곳뿐만 아니라 을지로 주변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는데요. 이 사진에서 영감을 얻어 을지로만의 세월과 감성을 지닌 폰트를 만들고자 배민과 산돌이 다시 뭉치게 되었습니다.
「을지로체」는 사라져가는 을지로의 시간을 폰트에 담고자 했습니다. 이를 위해선 을지로에 대해 더 알아갈 필요가 있었는데요. 그래서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진행했던 것이 을지로의 골목골목을 탐방하고 기록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지금은 재개발로 인해 많이 사라진 을지로 거리의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투박한 간판 글씨에서 오는 을지로만의 감성과 정서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느꼈던 공간의 정서를 폰트에 담기 위해서 꽤 오랜 시간을 배민의 디자인팀분들과 함께 소통하면서 구체적인 컨셉을 잡아갔습니다.
어느 정도 컨셉을 그린 이후에는 배민 디자이너분이 직접 손으로 글씨를 그리면서 원도를 만들었습니다. 처음 원도는 붓으로 직접 쓴 글씨다보니 획의 높이와 방향이 각각 다르고, 맺음의 형태도 글자마다 달랐는데요. 자유분방한 형태는 유지하면서 조형적으로 틀어지는 부분은 산돌의 디자이너가 같이 수정하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획의 형태나 인상은 자유분방하면서도 그 안에서 졍돈된 속공간과 비례를 가져가기 위해 수차례의 소통 과정을 거쳤습니다.
원도가 나온 이후에는 이를 디지털 폰트로 제작하기 위해 2,350자에 달하는 한글을 한 자씩 그려나가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을지로체」의 원본이 되는 글자의 수가 많지 않다 보니 거의 대부분의 글자를 상상하며 그릴 수밖에 없어 작업이 쉽지 않았는데요. 그럴 때마다 이 글자를 손으로 직접 쓰는 상상을 하면서 내가 직접 무명의 간판 장인이 된 것처럼 작업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후에는 라틴과 문장부호를 그리는 작업을 진행했는데요. 이 작업 또한 배민의 디자이너분이 손으로 직접 글씨를 먼저 그려주면 산돌에서 글자의 조형을 수정하여 완성하는 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그렇게 몇 달의 작업 기간을 거쳐 2019년 「을지로체」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을지로체」 출시 이후, 배민과 산돌은 을지로의 시간의 흐름을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까 여러 가지 방법들을 고민했는데요. 그러한 고민 끝에 탄생한 것이 「배민 을지로10년후체」와 「배민 을지로오래오레체」 입니다. 간판이 빛바래고 닳아 없어진 형태를 폰트에 담아 을지로의 그저 한순간의 모습뿐만이 아니라 세월의 흔적이 짙어진 을지로의 모습 또한 기억하고자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폰트로써 쓰이기 위해선 글자가 어느 정도 벗겨지는 것이 한계일지, 이 정도로 까져도 사람들이 글자를 읽을 수 있을지 등 많은 고민들이 있었는데요.
「을지로10년후체」는 간판에 써진 글씨의 10년 후 모습을 폰트에 담았습니다. 10년이 지난 글씨가 얼마나 벗겨질지를 상상하며 글자가 사라지는 모습을 단계별로 구분하고, 약 20%정도 벗겨진 모습을 기본으로 설정하여 제작했습니다. 반복되는 벗겨진 패턴으로 인해 나타나는 단조로운 인상을 피하기 위해 빈출자는 50%에서 70%정도로 더 벗겨진 형태를 ‘오픈타입 피쳐’ 기능을 추가하여 반복된 글자를 타이핑하면 점점 닳아 없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을지로오래오래체」는 딱 봤을 때 바로 읽히지는 않지만, 세월의 흔적을 깊이 느낄 수 있는 글씨를 폰트에 담고자 했습니다. 실용성을 최우선으로 보는 폰트의 관점에서 보면 힘든 선택이었지만, 「을지로체」가 을지로의 세월과 그 속에 담긴 을지로와 사람, 그 안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폰트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2021년 『을지로체 시리즈』의 마지막 버전인 「을지로오래오래체」가 출시되었습니다.
이제 『을지로체 시리즈』는 길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분들에게 사랑받는 폰트가 되었습니다. 이 폰트를 필요로 하는 어느 곳에서든 세월의 흔적으로 사용되었으면 좋겠습니다.